회심 & 칭의(구원의 서정)
회심은 문자적으로 '옮겨진다, 떠난다, 다른 데로 향한다'는 뜻으로, '마음을 돌이켜 나쁜(악한)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한다(신30:9-10). 즉,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믿는다든가 신앙에 불성실했다가 마음을 돌이켜 더욱 철저히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칭의는 '죄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된다.
회심
중생의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한 논의로부터 회심의 논의로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령의 특별 사역에 의해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은 회심을 일으킨다. 회심은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현저한 위기가 될 수 있지만, 점진적인 과정으로 임할 수도 있다. 종교 심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양자가 동일시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양자 간에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회심이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령에 의한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은 회심을 일으킨다. 회심은 중생의 외형적 증거이다. 회심은 죄를 미워하는 것이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심은 하나님과 사람의 일이다. 일차적으로 회심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 없이 우리 힘으로는 새 생명을 얻을 수도, 회개할 수도 없다. 예레미야애가 끝부분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그런 의미에서 보면 회심, 즉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면 나타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은 또한 우리가 돌이킬 것을 명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우리가 회심할 때 우리가 의지적으로 죄인 됨을 인정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돌아서는 행동을 하여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회심의 조성자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협력을 함께 말해야 한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을 포함하는데, 이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 회개가 먼지인가 믿음이 먼지인가에 대하여 칼빈은 믿음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과 회개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생으로부터 나오며 회심의 두 가지 측면들이다. 그래서 "구원받는 믿음은 회개 속에 깊이 잠겨져 있으며 회개 역시 믿음 속에 깊이 스며져 있다'라고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는 말했다. 우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1)는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보다 회개가 우선하는 것으로 다루고 있다.
칭의
명사 디카이오시스(δικαίωσις dikaio:sis, 칭의) 이는 신약 성경에서 두 구절에만 나온다(롬 4:25; 5:18) 이는 인간의 죄책에서 자유롭고 하나님에게 열납될 수 있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로써 야기되는 신분은 “디카이오수네”(δικαιοσύνη dikaiosyne)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청의란 타인의 의를 힘입어 도덕과 율법에 일치된다고 객관적으로 의로운 신분이 선언되는 법정적 개념이다. 즉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죄인에 대하여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를 칭의의 완전한 근거로 하여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은 또한 값없이 용서하고 죄인을 영접하는 은혜로운 아버지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믿음만으로 죄인이 순간적으로 칭의를 얻게 된다는 것에 반대하여 칭의는 주입된 은혜로서 선행으로 계속 증대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칭의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킨 선포적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칭의는 나아가 성화와 갱신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을 통해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부인하고 칭의에서 중요한 것은 좌용서보다 영적 도덕적 갱신이라고 주장한다.
칭의는 법정적이고 선포 적인 것이 아니라 성화를 발생시키는 은혜의 주입입니다. 믿음은 청의에 있어 중심적 의미가 아닌 부차적 의미만을 가질 따름이며, 칭의의 원천일 뿐이다. 죄인이 진실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이 아닌 세례를 통해서이며 또한 칭의는 죄를 지음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지만 선행을 통하여 그 의는 증감될 수 있다. 그러므로 로마가톨릭의 칭의 개념은 공로를 상정케 한다.
이와는 반대로 종교개혁자들에게 칭의는 순간적이고 완전하며 어떤 추가적 속죄행위나 선행도 불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칭의 교리와 관련하여 가장 흔하게 제기되는 반론은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배제하고 이루어지는 칭의라면 그리스도인의 윤리라든가 성화를 위한 노력은 그 정당한 자리를 잃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리는 칭의를 위해서는 우리의 행함이 배제되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는 행함이 따라온다는 말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칭의에는 성화의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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