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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전투적 교회와 승리의 교회(교회론 ἐκκλησία)

by 언약과 빛 2023. 6. 9.

9. 전투적 교회와 승리의 교회(교회론 κκλησία)

 

전투적 교회와 승리의 교회

 

 

전투적 교회 : 지상의 교회는 사탄과 싸울 의무가 있다. 싸움을 잊어버리는 것은 지상교회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이다. 교회는 싸움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싸움은 지상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며, 이 싸움이 끝난 그곳에는 승리의 면류관이 있다.

 

승리의 교회 : 지상의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라면, 천상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다. 칼은 천상교회에서 승리의 종려나무로 바뀔 것이며, 전쟁의 함성은 승리의 노래로, 십자기는 면류관으로 대체될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의 교회 외에 고난 받는 교회를 말하는데, 이 교회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있지도 않으면서 하늘의 기쁨에도 아직 들어가지 못한 연옥에서 고통 받는 자들을 포함한다. 그런데 한편 천상의 교회만 승리적 교회로 볼 것이 아니라 지상의 전투적 교회도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 불가견적 교회와 가견적 교회

 

하나님의 교회는 한편으로는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 구분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루터라고 보는데, 다른 개혁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다. 하지만 종종 개혁자들을 비판하는 자들은 그들이 두 개의 분리된 교회를 가르친다고 공격했다. 하지만 칼빈과 루터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는 두 개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참된 교회가 가지는 두 가지 양상에 대해 말한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참된 믿음이 없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유형교회의 일원으로 속하여 있을 수는 있으나. 그들이 보이지 않는 참된 무형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분명히 구속의 복을 전달하는 중개자로 주요한 역할을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경우, 이 같은 복의 분배권을 외적 기관인 교회, 특히 '말하는 교회인 성직자 계급에 부여하면서, 하나님과 그 자녀들 사이에 중재자로서 인간 사제직을 설정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11.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가장 중요한 우리의 은혜의 방편이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신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의 방편으로 언급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그리한 국면이 아니다. 성경은 신학적인 '지식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를 확장하고 성도들을 교육하고 양육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편이다. 교회의 처분에 맡겨진 은혜의 공적인 방편으로서의 말씀과 성례는 단지 교회의 합법적이고 적당한 자격을 가진 직원들에 의해서만 시행될 수 있다.

 

그러나 성례와는 달리 말씀은 모든 신자에 의하여 세계에 전달될 수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작용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단지 말씀만으로 회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말씀 없이 역사하실 수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역사에서 말씀과 성령은 함께 역사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두 가지 구분이 존재한다. 보통 구약성경은 율법을 담고 있고,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식의 이해는 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도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율법의 세 가지 용법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설명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정치적 또는 세속적 용법.

둘째는 몽학 선생 또는 정죄적 용법.

셋째는 교육적 또는 규범적 용법이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하는 기능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기도 하지만 율법의 규범적 기능을 동해 이 땅 위에서 신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12. 은혜의 방편으로서의(기도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따라 말씀과 함께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고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주장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8번은 기도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원을 하나님께 고하고 그의 뜻에 합당한 것을 간구하여 죄를 자복하며 그의 자비하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기도에 관한 아주 좋은 정의임이 분명하다. 이런 가르침은 어떤 사람의 소원에 대한 간구와 청원을 기도의 최전선에 서게 한다. 물론 여기에 중요한 조건이 붙어 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그리고 죄의 고백과 감사와 찬양이라는 행동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므로 이러한 간구로서의 기도는 개혁파 신앙의 삶과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때로 간구나 청원으로서의 기도를 다른 기도보다 저급한 형태의 기도로 취급하곤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청원 기도는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그 핵심에 서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청원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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